こい/novel

무대에 서는 것이 좋았다. 한참 어리던 시절부터 음악에는 유난 소질이 있었다. 안무가 거칠어도 흔들리는 실수 없이 곧은 피치로 피워 내는 가창. 저에게로 쏟아지는 수천의 이목이 반가워 망설이지 못하는 기개가. 새카만 그림자가 진 세트 후면에서 임시로 설치한 계단을 휘청이지 않고 밟아 오르는 보폭이. 천부적 재능이자 유일의 무기라고 여겨 왔다. 어항 속 물에서만 자생이 가능한 금어처럼. 오로지 스테이지뿐이 저가 살고 호흡할 무이의 곳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더운 스포트라이트. 저릿하게 부르트던 다리. 불편한 의상의 거추장스러운 장식과. 버겁도록 도약하여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그 무엇이더라도 꾹 참고 견뎌 낼 수 있었다. 파랑으로 짙게 피어나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일 정도는 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르고 높은 단에서 행복의 감정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저의 곡으로 여러 이들이 기뻐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 아침에는 기상하여 내일 꾸려야 할 연습을. 저녁이면 전철에서 어제 이루었던 발전을 복기했다. 학업과 병렬하는 활동 스케줄이 체력에 부치고 무척이나 피로하였어도. 여유 부족으로 수면 한 점 않고 등교해야 하던 나날. 불구하고 평생이더라도 해낼 수 있었다. 매일을 그러한 다짐으로 이기고 기웠다. 저가 정한 길이며 기량도 따라 주는 일. 함부로 포기하지 않겠다 맹세했다.

그러므로. 적확하게 언제 착수되어 버린 현상인가에는 그 누구도 명료한 답을 짓지 못할 터다. 저마저가 그 시始와 결結을 모르는 까닭이다. 단지 어느 날 안개 서린 듯 앞이 부예지고 머리가 어지러워 그는 간이 의자로 묻혀 있을 뿐이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신열이 늘어진 뺨으로 송글 맺히는 땀. 매진은 소망조차 않았고 남은 티켓의 수를 세는 일 역시 그만둔 지 오래였다. 본래 허튼 기대나 의존 따위에는 무게 싣지 않는 축이었다. 괜스레 품은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스러지는 일이 잦다는 것 즈음은. 넉넉하게 인지하여 흥미를 비우고 새로 빚었다. 그런 것에 매달리지 않아도 공연은 치를 수 있다.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는 한.

그렇게 확신했다. 슬럼프나 침울 같은 것들. 나약한 이들의 변명이라 간주하고 혹은 모조리 치부했다. 그런데 어째선가. 무너진 고개를 차마 가눌 수 없었다. 잔류한 표가 바닥에 산란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배경으로 드리우는 엠알의 음이 엉키고 꼬여 난해했다. 이마를 찌르고 제 등은 터트릴 듯 직선으로 내리쬐는 조명이. 성가시더라는 티 내며 건조하게 제 이름을 호명하는 스태프의 고함이. 얇은 대기실 벽 너머 성대하게 들려오지 않는 환호가. 고작 일 미터를 걷지 못하도록 무겁고 아득하게 다가왔다. 어렴풋 흐려지는 시야로 과열된 카메라를 노리며 문득 생각했다. 만일 저가. 이 길고 벅찬 오늘을 채 버티지 못한다면.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삐 소리 이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무감하게 녹음된 안내 코멘트가 번지고 나유타는 기권하듯 버튼을 누른다. 이어지지 못한 선이 뚝 종료되자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것으로 벌써 여섯 회째 착신 거부다. 이토록 장기로 연락이 미치지 못했던 사례가 있었던가. 차분하게 짚으며 반추하다 그대로 단말을 내렸다. 어제는 논제에서 의의를 잃었다. 시키와 은혜가 없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그는 하늘을 우러른다. 구름 조각도 없이 화창한 낮. 해당 이유를 모르는 처지는 아니었다. 도리어 은혜와 가장 가까운 위치로서 여느 지인보다 상세하게 헤아리고 있다 자신하였으나 그래도. 이런 식의 도피는 너에게 외려.

최근 은혜는 자주 현기증을 앓았다. 대개 상영을 준비하는 시기마다 벌어지는 일이었다. 병세는 주로 심하게 스미었고 간혹 성글도록 안을 싸그리 비웠다. 그럼에도 통증이 가슴 가득 고이지 못해 그나마 행위가 가능할 적이면 그는 모든 절차를 철저하게 소화했다. 수업과 훈련 등지가 조밀하게 설계된 일과 한 개를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그 과정에서 따르는 흠집은 전부 혼자서 감수해 내려 들었다. 무리와 부담은 예사였고 지나친 레슨으로 목이며 인대가 회복할 새 없어 상했다. 나유타는 그러한 초과적 예정의 일부를 만류하고 싶을 뿐이었다. 은혜를 걱정했다. 저보다 활기차고 속이 너른 은혜를. 감히 지켜 줄 수 있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저에게 돌아온 것은. 부재중만 몇 통이 찍힌 수화기를 상기한다. 팔을 베고 엎드리자 저 멀리 은혜의 학교 건물이 채였다. 은혜는 학생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임하고 있겠지. 틈이야 매사 모자라는 탓에 제 협소한 반경을 멋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한창 강의 중일 너의 교실로 둥실 날아갈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남녘에서 부드러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공상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두 달음에 너를 향해 훌쩍 뛰어 다다랐을 텐데. 너를 품으로 당겨 회화하고 싶다. 기계와 전신 같은 별도의 장치를 통하지 않는 오 센티미터 간격에서. 서로의 표정과 온기를 체감하며 이야기한다면. 오해하는 일 없이 상호에게 공감할 수 있을 터다.

띠리링. 전자로 설정된 기본 벨이 퍼지고 나유타는 퍼뜩 숙였던 허리 펴 발신인을 확인한다. 관계자의 번호인 것을 판명하고서는 다시 거꾸러져 허공이나 뚫었다. 일 따위는 차치하고 당장 너에게로 가고 싶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 더욱이. 재촉이 거세지기 이전 하강해야 했기에 그 이상 미적이지 못했다. 허름한 문 열고 디디려다 돌연히 등 돌려 지평선을 관망했다. 결코 생경하지 못한 교기校旗가 서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너도 나와 같은 볕을 받고 있다면 좋겠다. 심야처럼 녹이 슨 어스름 아래 네가 있지 않았으면. 내가 없는 곳에서 너 홀로만이 애닳고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면. 나 때문이 아니어도 그저 네가.

아이돌로서의 은혜를 응원했다. 누구도 이의하지 못할 첫 팬이 되어 은혜를 애호한다 자신할 수 있었다. 그가 잘 되기를 희망했고 제 안정보다 그의 성취 위해 거동하는 일이 숱했다. 은혜의 노래로 전해졌던 마음과 감격을 직접 겪었다. 여타보다 수북이 납득하는 폭이라며 허투루 저를 회의하지 않았다. 은혜만큼 은혜를 해석하고 있다고 감정했다. 그러나 일편의 간절한 의향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 염원이. 아름답고 잔혹한 이 세계에는 무수하게 흩어져 있다. 가령 기도와도 같은 제 부탁을 청취하고 희미하게 낯이 사위던 은혜의. 시각. 그가 트레이닝 닫은 새벽이었으며 공간은 언젠가의 겨울을 배경으로. 그와 저가 눈을 맞았던.

은혜야. 가끔은 쉬어도 돼. 너무 어렵고 괴로우면 말이야. 네가 쓰리다면 아주 그만두겠다고 해도 괜찮아. 나는 말리지 않아. 되레 너를 지지하고 격려할 거야. 너의 감상이나 의도. 목적도 다분하게 있겠지만 그들보다. 아니 비교 군집으로 그 무엇이 저울에 놓이든. 설령 네가 장래 이행코자 노력해 왔던 유구한 과거와 비전이 걸린다 하더라도. 종내 제일 중요한 것은 너잖아. 그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여기까지 열렬하게 공을 들였으니 그런 증상이 나타나도 이상한 해프닝은 아니지. 네 심신에도 충분한 안식은 절실해. 성실과 끈기가 꼭 옳은 방향으로 너에게 반환된다고는 못 해. 그러니까 일은 잠시만이라도 정지하자.

은혜는 물기 없는 억양으로 고했다. 그렇지만 이런 내 심정을. 과연 오빠가 온전히 공유할 수 있을까. 은혜야. 초조하게 저지하는 것에는 곧장 착오하지 말아. 오빠에게 어떤. 잘못이나 원인이 귀속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야. 나 또한 오빠를 고스란히 파악하지 못해. 아무리 비슷한 환경과 사정을 지녔다 하더라도 미처 찾지 못하는 각자의 영역이 있어. 나유타가 묵연하자 은혜는 담담하게 잇대어 구句를 지속한다. 체념한 듯 수몰된 투로 그가 지그시. 그래. 근심해 줘서 고마워. 오빠에게 있어서는 고생스런 일이겠지. 그래도 이 일에 관하여는 나를 신뢰해 주면 안 될까. 다소 까다롭더라도 나를. 다만 이해해 주면 안 될까.

그 아무렇지 않은 듯 밋밋한 어조가 상흔으로 옮았던 저녁. 일정을 치우고 귀가하여 그늘이 진 방에서 나유타는 침대로 쓰러진다. 불그죽죽 물든 노을이 고요한 빌딩 숲 건너로 떨어지고 있었다. 탁 트인 창 너머서는 하교하는 어린 생도의 대화가 배여 왔다. 삽시라도 가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자연스레 부상하는 너의 모습. 너는 지금 전차에 저를 싣고 고민하고 있을까. 현실이니 이상. 무거운 알약이며 환한 스트레스. 너의 지극히 사적으로 이루어진 선호와 어찌할 도리 없이 불거져 가는 예후 사이에서. 그러고도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결말에 재차 과부하를 자처해 다루고. 그렇게 부합하지 않는 미련으로 거듭 밤을 지새우고 있을까.

은혜와의 통화가 성립되지 않는 수 주 동안 많은 것들을 구상했다. 이러한 단계를 예기하지 못할 수도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넘치고 흐르는 지척의 시대서는 흔한 장면이다. 화려한 홀의 어두운 이면을. 누구라고 의식 못 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 그에 불구하고. 이보다 이르게 일러 주어야 했던가. 밝고 따스한 네가 해를 입어 스러지기 전에. 일생을 음지에서 지냈던 내가. 견고하고 활발한 너의 천성을 과신하였을까. 제 주위로도 신경을 무디게 구사하는 나의 기질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일까. 은혜는 부인해 주었어도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도 말미에는 제 과실과 오류로 귀결되었으리라는 감회를 털기가. 거북스러웠다.

불씨는 그것만이 안 되었다. 미약했던 시작. 단 너의 절망을 목도하고 싶지 않다는 소박스런 정서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생시와 잠재의 경계에서 구별 않았던 양면은 자라고 뻗어 났다. 웅덩이의 간조가 정강이로 차 무릎째 잠겼을 나절에야 위태를 지각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갈변을 그치게 할 수 없었다. 하물며 오직 나만을 그리워해 주었으면. 그가 나의 유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불결하고 메스꺼운 고의를. 아무렴 은혜를 돕기 위하여라고는 하나. 저에게 그를 나무랄 만한 권리가 짐짓 실재라도 하는가. 너를 편애하고 있으니까. 라는 것은 종국에는 핑계이자 구실이다. 어쩌면 그러한 상념으로 저는 은혜를 얽고 구속하려 했을지.

오빠. 우리에게 당분간 여백이 필요할 것 같아. 취침할 무렵마다 그의 마지막 어절이 숨결처럼 떠올랐다. 은혜를 대하는 태도야 저에게도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평소 물건이나 생체에 소유라는 개념을 지워 본 기회가 없었다. 저가 얻은 것보다 앗기는 쪽이. 주관대로 동작하지 못해 타자의 지시를 받는 축이. 갈망이 아닌 포기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았고 저에게 일치하며 걸맞는 형편이라 한정했다. 제가 부재하는 장소서도 늘 곧고 고운 은혜. 그와 어울리는 시키에의 질투. 일그러진 애착과 집념. 자못 혐오스런 심증들이 저를 따갑게 좀먹는 듯했다. 이런 나의 사고. 추악하고 흉측스런 본성을 네가 읽게 된다면. 너는 무슨 반응을 드러낼까.

낙조가 까마득 저물고 일출이 어슴푸레 회전하는 줄곧. 소파에 누워 은혜의 초상을 그렸다. 깨어 있는 하루의 전체를 그에게 투자했다. 잠들지 않고도 꿈을 볼 수 있었다. 잊히지 않을 잔상처럼 새겨진 은혜의 전언을 회고한다. 오빠도 알잖아. 내가 외양보다 한결 네거티브하고 종종 쉬이 중단하고 싶어도 한다는 것. 그러고도 단념 않는 데는 나름의 사유가 있을 것이라는. 그와 비슷한 추측은 해 본 경험이 없어? 나를 진심으로 살피던 게 맞아? 전송된 현장을 조회한다. 저에게는 익은 학교 부근. 야경 그림자에 전등 줄이 흔들리고 시계 초침 소리는 덩그러니 공허한 방을 메운다. 주소를 읊조리며 꺼풀을 감았다. 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어이 방문한 고교. 우연스럽게도 은혜의 콘서트가 있는 정오였다. 끼니는 거르고 어떻게든 겨를을 만들어 허락까지 받아 냈다. 기한은 넉넉하게 어림해야 겨우 십 분. 스태프의 설교에는 대충 응하고 관람권 다섯 장을 움킨 채 입장했다. 간극을 설정하자고는 하였으나 일방으로 잠깐 밟고 귀환하는 것 정도야 괜찮으리라고 믿었다. 아니 그러고 싶어 고집했다. 후드는 뒤집고 마스크를 걸쳐 방해가 되지 않으려도 매진했다. 예행하는 정경은 관조한 적 있었어도 실연을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못내 긴장이 되었다.

좌석 없이 스탠딩 칸이 설치되어 있는 강당은 거의 비어 있었다. 적은 수의 관객은 주로 돌출된 세트 직전까지 쇄도하여 후면이야 가만 리스트를 구경하기 좋았다. 스피커 옆으로 숨어 무대 위의 은혜를 제한 내 한껏 메모리에 수록하고 복귀할 도모였다. 그러나 흐트러진 분홍 머리카락. 거추장스러운 의상과 모난 굽. 스스로 개조한 장식. 흐르는 땀이며 벗겨지는 칠. 그를 실제로 주시하자마자. 그제에도 경청했던 곡과 자작한 가사를 묘사하는. 은혜를 발견하는 순간. 태양을 부어 온 은하의 찬란으로 반짝이는 동공. 그 눈과 스치는 찰나에야 깨닫는다. 그래. 진정 너를 위하는 마음은 결코. 거창하고 번거로워 각별한 작위가 아니고. 다른 어떠한 부수도 없이 오로지.

오빠? 대체로 경비가 없어 은혜의 이용이 빈번하고 인적은 드물었던 후문. 공연이 파하고 나유타는 관계자의 감시 피해 몰래 경로를 이탈했다. 뒤로 나와서는 출구 정면의 골목 담벼락에 대어 서 무작정 은혜를 기다렸다. 은혜와 만난다면 그를 끌어안아 참회하고 싶었다. 저의 체온을 넘기며 사죄하려 했다. 한데 호기롭게 대기하던 것치고는 용기가 미흡스러웠다. 막상 열흘 단위로 얼굴 접할 수 없었던 은혜를 가까이서 마주하니 불안이 몰렸다. 이렇게 빛이 나는 네가. 나를 증오하고 있다면. 약지 하나 차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해 소매만을 붙들 뿐이었다. 갈증으로 타는 목을 간신히 축여 푹 숙인 채 나유타는 발화한다. 미안. 미안해 은혜야.

내가 나빴어. 나의 욕심. 불온스런 이기에서 탄생한 감정을. 너를 아껴 주는 방도라고 독단으로 착각했어. 너를 우선하는 척하며 내 입장만 내세웠던 것 같다. 너의 연인으로서는 그럴 수 있다고 함부로 판정하고 선언했지. 솔직해지자면 나. 러버라는 타이틀에 더 집중해 너를 매고 싶었어. 네가 군중에게 웃어 주지 않았으면 했어. 나를 첫 번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했어. 나만이 외따로 여지껏 구성하고 지어 왔던 모든 과정을 만일 네가 가늠하게 된다면. 그래서 내가 머금었던 칙칙하고 우중충한 사념이 너에게로 끼친다면. 너는 나를 떠나 버릴지도 몰라. 그러므로 네가 나를 미워하고 꺼린다 해도. 나는 이제 이견 같은 것 낼 수 없어.

그래도 말이야. 혹시 너만 괜찮다면. 이런 못난 나를. 부디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앞으로는 실수하지 않아. 완전하게라고는 못 하더라도. 애를 써 노력할게. 내일에 필시라는 전제는 자리하지 않는대도. 비뚤어진 지구를 바루는 일은 분명 간단하지 못할 거야. 항성끼리 치르는 충돌을 감수해야 하겠지. 나는 나대로. 너는 너에게 쏠려 이완보다 마찰이 잦을지도.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빈도 역시. 늘어날 확률이 훨씬 클 거야. 그럼에도 나의 죄를 사해 받아들여 줄래. 나의 다수를 고쳐라도 주욱 너의 곁에 있고 싶어. 너와 헤어지기 싫어. 계속해서 너를 성원할 수 있게 해 줄래. 은혜 너의 남자 친구. 아이돌 은혜의 일 호 팬으로서.

고해 성사하듯 문장을 마치고 턱 추켜 대면한 은혜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뭐래. 누가 오빠 시켜 준대?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유타가 당혹마저 감추지 못하고 은혜는 그제서야 푸핫 참아 왔던 웃음을 터트린다. 늑골 기저 저 깊이 암흑으로 응어리진 무언가를 풀어내듯 가뿐한 감각. 고민 없이 산뜻한 마음으로 일으키는 실소가. 실로 오랜만이었다. 고열에 시달리던 이마가 얼핏 서늘해진 것도 같았다. 둘을 휘감는 온화하고 싱그러운 기류. 짙게 끼어 있던 안개가 걷힌 듯 또렷하고 개운한 정신으로 호흡했다. 내내 제 자락만 만지던 나유타를 떼어 두고 은혜는 단단하고 정직하게 반론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 오빠. 나도 어리석었는걸.

시차 부적응 같은 것이라고 판단했어. 고단과 피로 그 전부가 단지 일시적 상태일 뿐이라고. 그래서 양보할 수 없다 여겼어. 이건 나의 문제이고 내가 처리해야 할 사안이었으니까. 그야 내 몸이잖아. 타인보다 내가 더 잘 헤아리고 있을 거야. 그런 염려와 자만이 겹쳐 절로 오빠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나에게 권유나 충고를 수인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마냥 강행만 한다고 수그러져 회복되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 나 스스로에게도 일정 수준 할당은 있으나 마침내 외부의 일이지. 감기처럼 간주해 꾹 참고 있어 봐야 나만 곪아 들어가리라는 것을. 가까스로 지득했어. 그간 종일 오빠를 회상했었거든.

나의 휴식이 나를 구할 타이밍도 있다는 것. 나는 절대 음악을 그만두지 않아.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브레이크 걸어야 한다는 것. 이대로 하다가는 쓰러질 것 같기야 하더라고. 올해가 멎어 있을 적기라는 결론이 산출되어 정해졌어. 고마워 오빠. 저를 향해 팔 벌리는 은혜에 나유타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품으로 기울었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헐거운 구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별은 무슨. 그건 내가 허락 안 해. 그러니까 도망칠 음모는 세우지 말아. 심장이 덜컥 침잠하는 구절에 뻣뻣이 응고되어 있던. 그제야 나유타는 은혜를 따라 푸스스 일소한다. 봄눈이 녹듯 사르르 풀린 팽창은 끄르고 기꺼이 은혜로 가득 저를 채웠다.

간만의 데이트는 고대하던 것과 다르게 코스를 헷갈려 표류해야 했다. 얼마 떨어져 있었다고 연애 초보가 되어서는. 쇼핑 복합이나 하라주쿠 같은 유명한 지역들을 배회할 수는 없었으나 단. 전철 건널목과 횡단보도. 육교에서. 우리의 추억과 흔적이 군데 묻어 선명한 마을을 관망했다. 전혀 생경하지 못한 거리를 걸었다. 내리 손을 맞잡은 채였다. 예정했던 선을 한참 초과해 쏟아지는 연락. 라인 메신저와 문자가 쌓여 뜨거워진 휴대 전화를 매너 모드로 변경해 놓고는 말았다. 자백할 것이 있는데 나. 오빠처럼 배틀 공간에 넌지시 찾아가 보기도 했어. 시키에게 질의해서. 그래. 우리는 도저히 구제가 불가한 인연이야. 이토록 사소한 환희가.

있잖아 은혜야. 사실 나. 너 더 잘 되게 해 달라고 빌어 볼까도 싶었어. 너와 교차하지 못하던 동안에. 모퉁이에 위치한 신사나 가로의 비석. 하다못해 놀이터 미끄럼틀 꼭대기에서라도. 그런데 결국에는 하지 않게 되었네. 왜? 은혜가 묻자 그는 어설퍼도 제 성의껏 답한다. 너는 반드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서. 나의 희미하고 자그마한 기도 같은 것 없이도. 너 혼자만의 의지와 능력으로 충분하게 말이야. 너는 그럴 만한 아이니까. 그렇게 대단한 소질을 갖추고 있잖아. 너에게 나는 필수가 아닌 것 같아. 내가 고작 나를 보태지 않아도 너의 수단으로 성취해. 너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야. 하나 은혜는 단호하게 그를 꾸짖는다. 무슨 말이야 오빠.

그렇게는 혼란하지 말아. 나에게도 이따금은 기댈 곳이 필요해. 신 따위로 허투루 기대지 않는 나 대신 하늘에 간청해 줄 누구가 있었으면 좋겠어. 이유도 없이 바깥이 두렵고. 얇은 나의 가슴이 한 점 바람에도 무너질 듯 시린. 그런 오후마다 언제고 아늑하게 돌아갈 수 있는 집 같은 이가. 유독 힘에 겨운 하루를 보낸 어느 평일이면 어서 와. 아니라면 수고했어. 다정하게 속삭이며 나를 안아 줄. 마주 닿아 있던 갗은 조금 덜 성글게. 더 빠듯이. 바투 붙어 서로의 난기를 나누었다. 푸른 창공에는 비행기가 뜨고 부유하던 그의 시선이 은혜와 부딪친다. 부시어 햇살 같은 희소와 간지러운 너의 두 마디. 봐. 그런 존재가 내 곁에. 불그스름 달은 뺨도.

시내 마지막 코스로는 프린트 클럽을 경유했다. 아깝다. 메이크업 얼추 지웠는데. 끝나고 그대로 나올 걸 그랬어. 애초 방과 후에는 곧장 귀가할 의도였고. 오빠가 도착할 줄도 몰랐지 나는. 필터 고르며 은혜가 아쉬운 듯 토로하자 나유타는 그를 지그시 응시하다 지금도 예뻐. 엄청.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찍어도 돼. 은혜 너가 무효한 걱정을 다 하네. 그의 담백한 투에 은혜는 포즈를 선택하다 말고 큭큭댄다. 뭐야 오빠. 나 위로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은혜가 장난스레 회신하고 나유타는 살풋 쑥스러운 듯 고개 돌려 시선을 피한다. 글쎄. 원대하고 특정한 설계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현재 내가 느끼는 진심을 꺼냈을 뿐이야.

처음 겪는 프리쿠라 부스에 헤매이던 나유타를 이끌어 은혜는 아이돌스러운 자세들 지어 주었다. 이게 뭐야 진짜. 엉망으로 나왔잖아. 타박하고서도 은혜의 입매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진은 컬러 렌즈를 씌워 가공하고 집은 골드 펜으로 타블렛에 나유타 ♡ 은혜 포에버. 유치해도 귀여운 고백을 스티커 너머 빼곡 담았다. 열성으로 끄적이는 은혜를 바라며 나유타는 문득 직감한다. 선물과도 같은 오늘의 기억이 아마 평생토록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덧대어 기원했다. 이 시간이 잠시 멈추어 주었으면.* 혹은 영겁이었다면 좋겠다. 이 기적キセキ이 우리의 궤적きせき에 유구하게 머물러. 비로소 평범한 일상이 되기를.

이 회째 촬영 종료와 일시에 재차 진동이 울려 그가 주저 않고 전원을 꺼트린다. 은혜는 미처 채지 못해 그만의 탈선으로 남았다. 나유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체 느긋하게 왼편으로 낙서에 참여했다. 다만 오른 축을 은혜에게 내어 준 채였다. 교제 기간이 얕았던 것도 아닌데 스킨십은 시도할 적마다 여태 수축이 되었다. 겉이 축축해진다면 어떡하지. 나 박동이 너무 거세지는 않나. 너와 있으면 매사 그런 고심이 어렸지만 그래도. 은혜 님 사인해 주세요. 제 유치에 천연스레 대응하는 은혜를 시야로 담을 때마다. 무심코 그런 예감이 저를 누른다. 너와 나 영원히 해 달라는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 같아.** 그토록 단순하고 간절한.

출력한 용지 넉 장 구분해 가지며 오락실을 벗어났다. 어느덧 날은 개어 구름 사이로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무수한 인파 속에서도 굳게 이어진 검지를 다시 한번 꿋꿋이 쥐었다. 카만 구두와 두꺼운 운동화의 간격만큼. 도로로 번져 나부끼는 아지랑이. 막 맺혀 색이 엷은 잎과 꽃봉오리. 지평선을 거슬러 해도 치우칠 기미 없는 낮에. 불현듯 나유타는 단언한다. 그 어떠한 미래라도 겁나지 않아. 너와 나라면. 네가 나와 나란히 있다면. 우리가 함께라면 어디서든. 무엇이더라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그저 나만의 공상이나 비현실적 허황이 아니야. 이 선견. 대체할 수 없는 확신은 분명. 우리의 소중한 노력으로 결실을 피워 낸.


あいのちから


* 다 담을 수 있을까 / Diamond Bridge
** 사랑한단 뜻이야 / NCT DREAM

DALBOM